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리뷰 - 줄거리, 영상미 그리고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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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줄거리
어제 퇴근하고 비 엄청 쏟아져서 밖에 나가기 귀찮아서 집에서 넷플 뒤적거리다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다시 봤다. 원래 4년 전에 극장에서 봤던 건데 기억 가물가물해서 다시 봤는데 확실히 또 보니까 느낌이 다르더라. 영화는 1930년대쯤 어딘가 동유럽 어느 가상 국가(이름이 주브로프카인가? 기억이 안 남)가 배경임. 사실상 액자식으로 여러 번 과거로 들어가는 형식인데, 솔직히 시작할 때 좀 지루함. 작가가 호텔 주인 만나서 과거 이야기 듣고, 또 그게 회상으로 이어지고... 첨에 졸다가 큰일날 뻔했다.
근데 본격적인 내용은 구스타브라는 호텔 콘시어지(매니저 같은 직책)와 로비보이 제로의 모험 이야기임. 구스타브는 진짜 독특한 캐릭터인데, 딱 보면 완전 점잖고 격식 차리는 스타일인데 비밀은 호텔 묵는 나이 많은 부자 할머니들한테 "특별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거... 이 장면에서 내 친구 녀석은 맥주 뿜을 뻔했음. 어느 날 구스타브의 단골 할머니(마담 D.인가?)가 죽고 비싼 그림을 유언으로 구스타브한테 남김. 근데 할머니 아들놈이 발끈해서 구스타브를 도둑으로 몰아 감옥에 보내버림. 여기서부터 온갖 난리가 시작되는데... 감옥 탈출하고 스키 타고 도망치고 수도원에 숨고... 정신없음. 원래 쿠션 베고 누워서 편하게 볼려고 했는데 중간부터는 몸 일으키고 집중해서 봤다.
처음엔 그냥 코미디인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시대적 배경도 의미가 있더라. 전쟁 발발이나 파시즘 대두 같은... 역사 시간에 졸면서 들었던 내용이 영화에 쓰일 줄이야. 결국 구스타브와 제로는 그림도 찾고 누명도 벗고 할머니의 아들놈도 응징하는데, 이 와중에 제로의 여자친구(아가타)가 베이커리에서 일하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함. 이야기가 꼬이고 꼬이는데 중간중간 나오는 대사들이 진짜 웃김.
영상미
이건 뭐... 말이 필요 없음. 색감 완전 미쳤음. 분홍색 호텔 건물부터 시작해서 모든 장면이 알록달록함. 옛날에 여자친구랑 카페에서 영화 얘기하다가 "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봤어?" 했더니 "아~ 그 핑크색 호텔!" 이랬음. 그정도로 색감이 인상적인 영화. 웨스 앤더슨 감독 특유의 완벽한 대칭 구도도 눈에 띔. 화면 딱 가운데 주인공 놓고 좌우가 거울처럼 똑같이 생긴 장면들... 현실에선 절대 볼 수 없는 완벽함이 오히려 판타지같은 느낌 줌.
또 신기한 건 시대마다 화면 비율이 다름. 처음엔 '아 왜 갑자기 화면이 네모지?' 했는데 알고 보니 80년대는 요즘 영화처럼 와이드하게, 60년대는 좀 덜 와이드하게, 30년대는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게... 이런 식으로 시대감을 표현한 거였음. 이건 솔직히 영화학과 다니는 친구가 얘기해줘서 알게 됐다. 혼자 봤으면 '뭐지?' 하고 넘어갔을듯. 케이블카나, 눈 덮인 산 추격씬 같은 거 다 미니어처로 만들었다는 게 신기함. 요즘 영화들 다 컴퓨터 그래픽인데, 이렇게 손으로 만든 세트가 주는 아날로그 감성이 있음. 어릴 때 레고 만들던 기억나서 더 정감 있게 느껴졌음.
총평
진짜 웨스 앤더슨 감독 영화 중에선 이게 제일 균형 잡혀있음. 다른 것들은 템포가 느리거나 스토리가 약하거나 하는데, 이건 재밌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모험도 있고 유머도 있고... 다 적절하게 들어있음. 요즘 마블 영화처럼 그냥 폭발음 크게 해서 관객 깨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술영화처럼 암호 풀듯이 봐야하는 것도 아님. 랄프 파인즈 연기는 진짜... 대박임. 평소에 진지한 역할만 하던 배우가 이런 코미디를 이렇게 잘할 줄이야. 우아하게 인사하다가 갑자기 "What the FUCK?!" 하고 소리지르는 장면들이 진짜 웃겼음. 지난번에 친구들이랑 같이 봤을 때 그 장면마다 다들 빵 터져서 옆방 형이 벽 두드렸었음.
첨에 그냥 웃기고 예쁜 영화인 줄 알았는데, 두 번째 보니까 더 깊은 주제가 보임. 파시즘과 전쟁, 사라져가는 문명... 특히 구스타브가 지나간 시대의 품위와 예의범절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왠지 마음에 와닿았음. 요즘 회사 다니면서 대학생 때가 그리워질 때가 있는데, 그런 감정이랑 비슷한 것 같음. 영화에서 "시인의 공간"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게 왠지 기억에 남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는 소중한 기억들을 말하는 것 같음. 가끔 회사에서 짜증날 때 이 말 생각하면 좀 위로가 됨.
신기한 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30년대 유럽 호텔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점임. 어떻게 가본 적도 없는 곳이 그리울 수 있지? 근데 영화 보고 나면 진짜 그런 감정이 듦. 작년에 운 좋게 동유럽 여행 갔을 때 비슷한 느낌의 호텔 로비에 앉아있었는데, 영화 생각나서 괜히 감상에 젖어있다가 직원이랑 눈 마주쳐서 민망했던 기억이ㅋㅋ. 이 영화 보면 뭔가 디저트 먹고 싶어짐. 영화에 나오는 멘델스 과자(쿠르토시 말하는 듯)는 진짜 먹어보고 싶음. 찾아보니까 실존하는 헝가리 과자라고 함. 아가타가 만든 예쁜 케이크들도 군침 돎... 다음에 볼 땐 무조건 케이크 사놓고 봐야지.
아직 세 번째 관람은 안 했지만 곧 할 것 같음. 누구랑 볼지가 고민인데, 추천했다가 "별로던데?" 들으면 왠지 서운할 것 같아서... 취향 맞는 친구를 잘 골라야 함. 근데 솔직히 혼자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맥주 한 캔 마시면서 집중해서 보면 좋을 것 같음. 감옥 탈출 장면이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음. 구스타브가 감옥 동료들이랑 도망치는데, 그 와중에도 "신사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격식 차리는 거 보고 혼자 빵 터짐. 그리고 제로가 케이크 속에 미니 삽 숨겨 보내는 것도 재밌었음. 이런 디테일 하나하나가 영화를 특별하게 만듦. 뭔가 글 쓴다고 생각했는데 되게 길어졌네. 그만큼 할 말 많은 영화라는 뜻일듯. 암튼 궁금하면 한번 보셈. 안 후회할듯.
